■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선출… 배우 장미희예술가들에 ‘최고영예’ 예술원첫 지원에 만장일치로 통과돼이어령 “자기일 50년하면 전설”모든 미팅은 일하는 과정 연장목적없이 만나 차 마신적 없어30분~1시간전 도착 만남 준비데뷔 50년 차 배우 장미희가 오는 17일 대한민국예술원의 신규 회원으로 임명장을 받는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그를 영화제가 진행 중이던 지난 10일 만나 인터뷰했다. 박윤슬 기자“제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집안 어른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이제 마음 푹 내려놓고, 즐겁게,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셔야 해요’라고요. 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받았죠.”18세이던 1976년 영화 ‘성춘향전’으로 데뷔해 50년 차를 맞이한 올해, 배우 장미희는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인식되는 예술원 회원이 됐다. ‘재수’가 태반일 정도로 까다로운 관문을 첫 지원 만에 만장일치 투표로 선출된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7월 17일 개원한 예술원은 정원이 100명으로 제한돼 있다.오는 17일 정식으로 예술원 종신회원 임명장을 받는 장미희를 지난 10일 오후 경기 부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올해 29회째를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부천영화제)의 조직위원장으로서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중이었다.예술원 회원이 된 소감을 묻자, 그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냈다.“‘겨울여자’(1977), ‘별들의 고향2’(1978)를 막 끝낸 이후였을 거예요. 최인호 선생님과 같이 이어령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요. 막 스무 살이 지났을 때니 제가 얼마나 어린 친구인가요. 선생님께 ‘앞으로 어떻게 배우 생활을 할까요’ 하고 여쭤봤죠. 이 선생님 말씀이 ‘자기 일을 50년 해. 그럼 그건 이미 레전드로 들어가는 거야’였거든요. 보세요. 진짜 50년이 지나고 이렇게 제가 대한민국 예술원에 들어갔잖아요.”예술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뜻을 품은 건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2000년대 장미희는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 중 두 곳에서 보직을 맡았고, 또 대학교수로서 교단에 섰다. 그는 “고 김수용 감독님께서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예술원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런 곳이 있으니 지금처럼 계속 정진해서 열심히 해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지난 6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서교동 자택에서 커피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예술원입니다. (회원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장미희의 답변도 간단했다. ‘네.’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건조한 통화였다.장미희는 “등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선출… 배우 장미희예술가들에 ‘최고영예’ 예술원첫 지원에 만장일치로 통과돼이어령 “자기일 50년하면 전설”모든 미팅은 일하는 과정 연장목적없이 만나 차 마신적 없어30분~1시간전 도착 만남 준비데뷔 50년 차 배우 장미희가 오는 17일 대한민국예술원의 신규 회원으로 임명장을 받는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그를 영화제가 진행 중이던 지난 10일 만나 인터뷰했다. 박윤슬 기자“제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집안 어른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이제 마음 푹 내려놓고, 즐겁게,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셔야 해요’라고요. 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받았죠.”18세이던 1976년 영화 ‘성춘향전’으로 데뷔해 50년 차를 맞이한 올해, 배우 장미희는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인식되는 예술원 회원이 됐다. ‘재수’가 태반일 정도로 까다로운 관문을 첫 지원 만에 만장일치 투표로 선출된 것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7월 17일 개원한 예술원은 정원이 100명으로 제한돼 있다.오는 17일 정식으로 예술원 종신회원 임명장을 받는 장미희를 지난 10일 오후 경기 부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올해 29회째를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부천영화제)의 조직위원장으로서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중이었다.예술원 회원이 된 소감을 묻자, 그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냈다.“‘겨울여자’(1977), ‘별들의 고향2’(1978)를 막 끝낸 이후였을 거예요. 최인호 선생님과 같이 이어령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요. 막 스무 살이 지났을 때니 제가 얼마나 어린 친구인가요. 선생님께 ‘앞으로 어떻게 배우 생활을 할까요’ 하고 여쭤봤죠. 이 선생님 말씀이 ‘자기 일을 50년 해. 그럼 그건 이미 레전드로 들어가는 거야’였거든요. 보세요. 진짜 50년이 지나고 이렇게 제가 대한민국 예술원에 들어갔잖아요.”예술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뜻을 품은 건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2000년대 장미희는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 중 두 곳에서 보직을 맡았고, 또 대학교수로서 교단에 섰다. 그는 “고 김수용 감독님께서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예술원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런 곳이 있으니 지금처럼 계속 정진해서 열심히 해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지난 6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서교동 자택에서 커피와 과일로 간단히 요기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예술원입니다. (회원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장미희의 답변도 간단했다. ‘네.’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건조한 통화였다.장미희는 “등산가가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