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대를 찾아가는 길 26] 강화도 '용진진'과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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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ans339
Date 25-07-28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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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치과
[돈대를 찾아가는 길 26] 강화도 '용진진'과 좌강돈대, 용당돈대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중순의 어느 날 강화동 용진진을 찾아갔다. 고래를 베겠다는 염원을 담은 '참경루'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좌강돈대 성벽 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기자말>한반도 앞 바다에도 고래가 살았을까? 답은 '살았다'이다. 최근 유네스코 자연 유산에 등재된 울산 반구천 암각화에는 고래를 새긴 그림도 있다. 우리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는 증거다.반구천 암각화는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그림이다. 암벽에 새겨 놓은 그림을 통해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고래를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다.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 잠수하는 고래, 주름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큰 혹등고래 등 모두 57점의 고래 그림이 있다. 그중에 작살을 맞은 고래 그림도 있다. 말하자면 당시에 이미 고래사냥을 했다는 뜻이다.반구천 암각화 고래 그림반구천 암각화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잡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우리 역사에서 고래잡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1656년(효종 7)에 축조된 강화 '용진진'의 문루는 고래와 연관된 이름을 갖고 있다. 고래를 베어 죽인다는 뜻이 담긴 '참경루(斬鯨樓)'다. ▲ 강화 외성의 문루인 '참경루'.ⓒ 이승숙고래 '경(鯨)'자를 보면 '물고기(魚)'에 '서울(京)'이 붙어 있다. 고래보다 더 큰 동물은 육지와 해양을 다 통틀어서 없다. 그러니 '서울 경(京)'자가 붙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거대한 고래를 베어 죽이겠다니, 도대체 '참경'이 뜻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광해군에서 숙종 때까지 동아시아의 정세는 불안했다. 이 시기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시기로 동북아시아의 전환기이자 격변기였다.광해군 때 모문룡이라는 명나라의 하급 장교가 후금(나중에 청나라)과 교전을 하다 패하자 조선으로 넘어왔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군에 진을 치고는 만주족에 쫓겨난 한족까지 불러들였다.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될까 염려한 광해군은 모문룡의 일당을 철산군의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가도는 압록강 하구와 가까워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압록강 근처 '가도'에 주둔한 [돈대를 찾아가는 길 26] 강화도 '용진진'과 좌강돈대, 용당돈대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중순의 어느 날 강화동 용진진을 찾아갔다. 고래를 베겠다는 염원을 담은 '참경루'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좌강돈대 성벽 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기자말>한반도 앞 바다에도 고래가 살았을까? 답은 '살았다'이다. 최근 유네스코 자연 유산에 등재된 울산 반구천 암각화에는 고래를 새긴 그림도 있다. 우리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는 증거다.반구천 암각화는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그림이다. 암벽에 새겨 놓은 그림을 통해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고래를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다.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 잠수하는 고래, 주름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큰 혹등고래 등 모두 57점의 고래 그림이 있다. 그중에 작살을 맞은 고래 그림도 있다. 말하자면 당시에 이미 고래사냥을 했다는 뜻이다.반구천 암각화 고래 그림반구천 암각화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잡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우리 역사에서 고래잡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1656년(효종 7)에 축조된 강화 '용진진'의 문루는 고래와 연관된 이름을 갖고 있다. 고래를 베어 죽인다는 뜻이 담긴 '참경루(斬鯨樓)'다. ▲ 강화 외성의 문루인 '참경루'.ⓒ 이승숙고래 '경(鯨)'자를 보면 '물고기(魚)'에 '서울(京)'이 붙어 있다. 고래보다 더 큰 동물은 육지와 해양을 다 통틀어서 없다. 그러니 '서울 경(京)'자가 붙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거대한 고래를 베어 죽이겠다니, 도대체 '참경'이 뜻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광해군에서 숙종 때까지 동아시아의 정세는 불안했다. 이 시기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시기로 동북아시아의 전환기이자 격변기였다.광해군 때 모문룡이라는 명나라의 하급 장교가 후금(나중에 청나라)과 교전을 하다 패하자 조선으로 넘어왔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군에 진을 치고는 만주족에 쫓겨난 한족까지 불러들였다.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될까 염려한 광해군은 모문룡의 일당을 철산군의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가도는 압록강 하구와 가까워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압록강 근처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후금을 멀리 하고 명나라를 사대(事大)했다. 후금과 싸웠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 역시 후원했다. 매달 1만 석 이상의 쌀을 지원 해주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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